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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  신혼일기 28. 주말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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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56 작성일19-08-22 00:58 조회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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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남편과 프리즌 브레이크 정주행 중이다. 난 이미 여러 번 본 건데도 꺼벙이랑 같이 보니까 또 새롭고 재밌다. 얘랑은 왜 뭐든 재밌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는 있는데, 어제도 10시간이나 티비 앞에 죽치고 앉았던 터라 마음이 초조해졌다. 소파와 한 몸 되어 온종일 밀린 드라마 보고 싶은 마음과 일요일마저 이렇게 보내기엔 찝찝하고 아쉬운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다. 이변 없이 드라마가 이겼다. 하나만 더 볼까? 딱 하나만 더 보자. 그러다 해가 졌다.

시즌 2로 넘어와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던 드라마는 뜻밖의 도전자를 만나 패배했다. 찐한 키스는 미드보다 더 멈추기 어렵다. 나는 자연스럽게 티비를 껐다.

승리의 키스가 끝나고 책 한 권을 챙기며 내가 말했다.

책 좀 읽을까?

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그가 나를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갑자기 정말 멋진 하루처럼 느껴졌다. 넷플릭스에서 키스 그리고 독서로 이어지는 일요일 오후라니!

나는 그에게 뜨거운 보이차 한 잔을 부탁했다. 꺼벙이는 다정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보이차랑 석류주스를 들고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태도의 말들>을 펼쳤다. 3주 전에 나한테 선물하려고 몰래 샀다가 자기가 먼저 읽고 있는 책이다. 얼핏 보니 아직 서른 페이지도 채 못 읽은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얇은 책인데 진도가 왜 그 모양이냐고 놀리고 싶었지만 연필을 꽉 쥔 손이 비장해 보여 모른척해주었다.

아 맞다. 나 너랑 같이 듣고 싶은 거 있어.

뭔데?

얼마 전에 이슬아 작가가 연재 글 하나를 오디오 파일로 보내줬어.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건가 봐. 고독의 매뉴얼이란 글인데 자기랑 같이 듣고 이야기하고 싶더라고. 들어 볼래?

그래!

스피커로 이슬아의 목소리가 깨끗하게 들렸다. 엊그제 샤워하면서 들었을 때보다 더 좋았다. 그땐 혼자였고 지금은 남편이 앞에 있으니까 당연한 거다. 나는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는 꺼벙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일부터 워어어어얼화아아아수우우모옥금을 또 잘 버티려면 만땅으로 충전해야 한다. 그는 나의 고속 충전기다.

충전기와 함께 가만히 이슬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SNS로 연결된 리액션 인생에 대한 얘기에서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SNS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의 고개도 끄덕거리게 만드는 힘이 그녀에겐 있구나, 생각했다. 마지막 문장도 좋았다. 새로울 것 없는 얘기였지만 고독의 매뉴얼을 닫는 문장으로 훌륭했다. 이 사회는 연결보다 차단이 중요하다.

오디오 파일이 끝나자마자 앱스토어에서 forest를 검색했다. 두 달 전 즘 설치했다가 지운 앱인데 일간 이슬아 효과인지 그땐 없었던 한국어 유료 버전이 생겼다. 앱이나 이모티콘에 기꺼이 돈을 쓰는 나는 망설임 없이 2천5백 원을 결제했다. 꺼벙인 좀 머뭇거렸다. 일단 내가 먼저 해보고 좋으면 같이 하기로 했다. 그를 꼬드겨 같이 나무를 심어야지. 누가누가 더 울창하고 예쁜 숲을 가꾸나 보자고.

30분 타이머를 두 번 맞추는 동안 내 숲엔 나무 두 그루가 생겼다. 그사이 나는 <사생활의 천재들>로 필사 노트 세 페이지를 채우고, 마스다 미리 인터뷰에 그려진 그림을 오려서 책갈피를 만들었다. 꺼벙인 <태도의 말들>을 사십분쯤 읽은 후 윤종신 에세이에 바톤을 넘겨주었다.

와 지은이 소개가 멋지네.

왜? 뭐라고 써있어?

노래로 이야기하는 사람. 2010년부터 [월간 윤종신]을 통해 매달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고 있다. 이렇게만 적혀있어.

그러게. 심플하네. 멋지다.

남편은 윤종신의 간결한 자기소개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그룹 임원이 낸 책을 봤는데 이력이 너무 화려하게 써져있어 별로더란 이야길 덧붙였다.

마치 내가 이렇게 대단하고 잘난 사람이에요! 하고 외치는 것 같잖아.

응. 그래서 오히려 멋이 없어져 그치.

응.

응.

근데 뭐 그럴 수 있지. 윤종신 같은 사람은 이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응. 한두 줄로 자기를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나는 이 짧은 대화에서도 남편의 취향과 성격을 느낀다. 꺼벙인 단순하고 명료한 걸 좋아한다. 과시하는 걸 싫어한다. 자랑할 게 있어도 자랑을 안 하는 사람, 그런 점에서 슬아 작가가 늘 말하는 그녀의 엄마 복희와 꼭 닮았다. SNS는 돈을 얹어줘도 안 할 사람이다. 그리고 꺼벙인 그러려니 지수가 높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와 달리 그의 그러려니 지수는 매우 높다.

윤종신의 그 에세이는 내가 신혼여행 때 꺼벙이에게 주려고 깜짝 선물로 산 책이었다. 배송이 늦어져 챙겨가지 못하는 바람에 내내 내가 들고 있다가 얼마 전에 신혼집 책장에 갖다 놓은 건데 발리에서 읽어도 좋았겠지만 신혼집 테이블 위에서 읽는 게 어쩐지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꺼벙인 책에 나오는 노래를 계속 바꿔가며 틀어주었다. 그중엔 지난해 윤종신 콘서트에서 마지막에 들었던 곡도 있었다. 갑자기 그 여름의 하늘색이랑 날씨랑 공기랑 냄새가 떠올랐다. 그때 고속도로 로망스 따라 부르면서 어이없게도 조금 울었는데. 그 행복과 이 행복이 겹치자 또 눈물이 핑 돌려고 했다.

노트북을 열고 신혼일기를 쓴다. 이런 행복은 놓치지 말고 기록해두고 싶다.

인간은 수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지. 우리 안에는 우리가 쓰지 못한 힘, 탐험하지 못한 모습, 발견하지 못한 보물, 미처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 자아들이 넘쳐나고 있어. 우리는 그중 최악의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 끄집어낼 수 있게 서로 도와야 해.

_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아까 이 문장에서 주말의 모양을 떠올렸다. 일주일간 상상한 수많은 주말이 있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면 어떤 방식이어도 좋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아니다. 한 가지 모양으로 주말을 보내고 나면 미처 끄집어내지 못한 다른 주말들이 아쉬워진다. 집에서 밀린 드라마를 몰아보는 대신 우린 남대문 시장에 놀러 갈 수 있었다. 테이블 위 텅 빈 화병에 꽂을 꽃을 사러 손 꼭 잡고 동네를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뭐든 할 수 있었다. 티비보는 주말처럼 그 모든 주말도 가질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늦은 밤까지 멈추지 못하고 눈이 아프도록 드라마만 봤다면 분명 월요일 아침에 난 조금 슬펐을 것이다.

티비를 끄고 테이블에 마주 앉길 잘했다. 초를 켜고, 차를 마시고, 멋진 이야기와 음악을 들으면서 이야기 나누길 참 잘했다. 책을 읽고, 문장들을 옮겨 적고, 책갈피 만든 것도. 그리고 나무 두 그루 심은 것도.

꺼벙인 70분간의 독서를 마치고 야식으로 기름떡볶이를 만들러 갔다. 떡볶이 냄새를 맡으며 스물여덟 번째 신혼일기를 썼다. 비슷한 것들을 차단하면서, 미처 보내지 못한 시간의 모양들을 다듬으면서, 앞으로 서른 번 백번 오백 번째 신혼 일기를 쓸 때까지 그와 행복하고 싶다. 지금처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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